
쉐리와 피트를 한 잔에서 같이 느끼는 게 좋다.
달큰한 과실 뒤로 연기가 깔리는 그 구성이 내 입에 맞는다는 걸 몇 병 거치면서 알게 됐다. 그래서 그 조합으로 평이 좋은 병을 찾다가 이걸 알게 됐다.
위스키 하우스에서 샀다. 2024년인지 2025년인지 헷갈리는데 그 무렵이다. 정부 지원금이 나왔을 때라 그걸로 결제했다. 가격은 15만원이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60도가 넘는 캐스크 스트렝스를 이 값에 집을 수 있으면 괜찮은 쪽이다.
집에서 와이프랑 땄다. 맛만 보려고 그날 바로 열었다.
뚜껑을 따자마자 잔에 따랐는데 향이 확 올라오지 않았다. 맛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안쪽에 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60도가 넘는 술에서는 흔한 일이다. 알코올이 향을 덮고 있어서 열어둔 직후에는 잘 안 나온다. 시간을 주거나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알고는 있었다. 에어링을 좀 시켜놓고 다시 맛봤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위스키들 맛보느라 뒤로 밀렸고, 그러다 보니 2026년이 되어버렸다. 병은 여전히 집에 있다. 제대로 본 적은 아직 없는 셈이다.
60.6도치고 타격감이 높지 않았다.
보통 이 도수면 목으로 넘길 때 확 치고 들어오는 게 있는데 그게 덜했다. 부드럽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46도에서 57도 사이를 좋아하는데, 그보다 높은 숫자를 보고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순했다.
벤로막증류소는 스페이사이드에 있으면서 피트를 계속 쓰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아일라처럼 세게 때지 않는다. 쉐리 단맛을 덮지 않고 뒤에 깔릴 정도로만 넣는다. 내가 찾던 조합이 여기서 나온다.
내력이 좀 특이하다. 1898년에 문을 열었는데 1983년에 가동을 멈췄다. 그대로 10년을 방치돼 있다가 1993년에 엘긴의 독립병입자 고든앤맥페일이 사들였다. 다시 문을 연 건 1998년이고, 그 자리에서 첫 캐스크를 채운 사람이 당시 찰스 왕세자, 지금의 찰스 3세다.
내가 가진 병은 2014년에 증류해서 2024년에 병입한 배치 3번이다. 퍼스트 필 버번과 퍼스트 필 쉐리 캐스크만 썼다. 증류소 노트에는 노즈에 바닐라와 프룻케이크, 흑설탕, 생강이 있고, 팔레트는 크리미하면서 자두 조림과 세비야 오렌지, 굵게 간 후추가 나오며, 피니쉬에 연기와 아니스가 길게 남는다고 적혀 있다.
라벨에 적힌 문구도 비슷하다. 프룻케이크 향에 자두 조림과 마멀레이드, 후추의 매콤함, 그리고 연기와 아니스로 끝난다고.
이 글을 쓰면서 병을 다시 꺼냈다. 2년 가까이 묵혔으니 공기와 만난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따놓고 한참 둔 병은 힘이 빠지기도 한다. 발베니 싱글 배럴이 그랬다. 이건 어떨지 모르겠다. 눌려 있던 향이 풀려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조만간 제대로 앉아서 노즈부터 피니쉬까지 다시 느껴봐야겠다.
'위스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누구한테 따라줘도 좋아한다, 글렌드로낙 오드 투 더 다크 (0) | 2026.10.31 |
|---|---|
| 여보, 우리집에 발렌타인 30년 있어? (0) | 2026.10.30 |
| 13만원에 산 21년, 토마틴 21년 버번 배럴 (0) | 2026.10.27 |
| 선심 쓰는 척하며 비운 병, 글렌킨치 12년 (0) | 2026.10.26 |
| 줄 세우려고 샀다가 회식 자리에서 따버렸다, 조니워커 어 송 오브 아이스 (0) | 202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