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에 파견을 나가 있으면 술 선택지가 달라진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소주를 집었겠지만, 그곳에서 소주는 구하기 어렵고 비싸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와인이었다.
같이 지내던 분들 중에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도수가 소주와 크게 다르지 않고, 무엇보다 값이 쌌다. 우리끼리 암묵적으로 정해둔 기준이 있었는데, 한국 돈으로 6천 원선까지가 데일리로 마실 만한 와인이었다. 그 선을 넘어가면 특별한 날에나 집었다.
사진 속 이 병도 그 기준 안에 있던 와인이다. 폴카(Polka), 2017년 화이트. 가격은 30즈워티 안팎이었을 것이다. 한국 돈으로 1만 원이 채 안 되는 값이니, 그곳 기준으로는 부담 없이 집을 수 있는 가격대였다.
이 와인이 흥미로운 건 폴란드산이라는 점이다. 폴란드는 와인 산지로 떠올리기 어려운 나라다. 기후가 서늘해서 포도 재배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폴카는 크라쿠프 근교의 스레브르나 구라(Srebrna Góra)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들어진다.
품종 구성을 보면 그 서늘한 기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보인다. 이 화이트 와인에는 세이발 블랑, 솔라리스, 샤르도네, 요하니터, 히베르날, 피노 그리까지 여섯 가지 품종이 블렌딩됐다. 이 중 솔라리스나 요하니터, 히베르날은 추운 지역에서도 잘 자라도록 개량된 하이브리드 품종이다. 익숙한 샤르도네나 피노 그리에 이런 품종들을 섞어 폴란드 땅에서 와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맛에 대한 현지 평을 찾아보니 대체로 비슷했다. 사과와 감귤, 배 같은 과일 향이 뚜렷하고, 라벨에는 드라이로 적혀 있지만 잔당이 남아 있어 실제로는 세미드라이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산도가 받쳐줘서 균형은 잡혀 있고, 와인에 막 입문한 사람이나 드라이한 와인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평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이 와인을 어떤 맛으로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건 숙소 침대 위에서 찍은 사진 한 장뿐이다. 그 시절 나는 술을 기록할 생각 없이 그냥 마셨고, 이 병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당연하다. 그때 이 와인은 음미의 대상이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단이었으니까. 낯선 나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소주 대신 손에 잡히는 술을 따라 마시는 것.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시절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폴란드에 다시 갈 일이 있다면 이 폴카를 한 병 사볼 생각이다. 그때는 제대로 맛을 보고 기록해둘 것이다. 폴란드 와인이 어떤 맛인지, 이제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외 주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샤먼 바닷가에서 마신 중국 명주, 우량예 39 (0) | 2026.10.12 |
|---|---|
| 입국장 면세점에서 산 코냑, 바롱 오타르 VSOP (0) | 2026.10.07 |
| 중국 4대 명주 서봉주, 그리고 자라탕을 모르고 먹은 날 (0) | 2026.10.01 |
| 시안의 조선족 한식당에서 만난 북한 술, 평양소주 (0) | 2026.09.29 |
| 이건 대체 어떻게 마셔야 하나요, 앱솔루트 베리 아사이 (0) | 2026.09.28 |